대단한 필력과.. 그에 상응하는 깊이를 갖는.. 선한부자님의 글이다.
그분의 글을 한번씩 볼 때마다.. 얕은 내 글과 내 생각의 깊이의 하챦음을.. 느낄 때가 있다...
1. 파리 대왕
드라마 <대왕 세종>을 흥미롭게 찾아본다.
가끔씩 사람을 감동시키는 게 여간이 아닌지라 애착을 갖고 있다.
지난 달 방송, 북방 백성들이 도성에 방화를 했다는 소식을 들은 왕이 한탄하며 말한다.
“저들도 내 백성이 맞습니까.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이기적인 저들도 내 백성이 맞습니까.”
그의 대사에서 작가의 깊은 고뇌를 읽는다.
드라마이니 이야기가 풀린다. 도성에 방화를 저지른 이들이 사실 북방 백성이 아니라 딴 사람들이었대나 뭐래나. 왕도 북방에서 온 그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댄다. 그러니 서로간의 오해를 풀고, 그렇게 해결할 실마리가 드러나는 게다.
드라마니 가능한 이야기이다.
먼저 세상을 알고 사람을 알아가면서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음에 절망한다. 사람에게 실망할 일이 너무도 많다. 세상 속에 사람들은 더 한 일도 서슴없이 저지른다. 오해로 인해 서로 갈등이 커지는 경우도 없지 않겠지. 하지만 현실은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타인의 집에 불을 지르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 게 세상이더라.
다른 사람의 피부에 달라붙어 피를 빨겠다는 파리와도 같은 인생은 차고도 넘친다. 상대가 그나마 먹을 게 있고 넉넉한 사람에게만 달려드는 제 딴에는 양심껏 파리가 되는 사람과 죽을 지경이라 쓰러져 있는 사람에게도 피를 빨겠다고 덤벼드는 모진 파리가 있을 뿐이다. (그래야 별반 다르지 않다. 집파리냐 똥파리냐 차이가 아니던가.)
참으로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라 하니 당시에는 무슨 내용인지 이해도 되지 않은 채 지적 허영으로 들었던 책 <파리 대왕>
25명의 아이들이 무인도에 추락한다. 아이들 중에는 구조받기 위해 높은 곳에서 불을 피우자는 리더가 있었고 반대로 구조를 포기하고 이 섬을 고향이라 여기며 살자는 반대쪽 리더가 있었다.
구조를 바라는 쪽은 불을 피우는 게 최고의 과제가 된다. 불을 피우고 유지하는 데 집중하고 남는 시간에 겨우겨우 살아갈만한 간단한 사냥과 채집으로 연명해야 한다. 반대로 갱이 된 무리는 구조를 포기하고 그곳이 고향임을 외치며 돼지 사냥에 나선다.
아이들은 갱 무리가 퍼트린 괴물에 대한 두려움과 또 돼지고기 맛에 끌려 점차 갱으로 들어온다. 결국 구조를 바라는 쪽은 거의 남지 않게 되고, 심지어는 갱들에 의해 괴물로 지목되어 쫓기기도 한다. 갱의 리더를 우상화하기 위해 얼굴에 색을 칠하고 나무창으로 괴물로 지칭된 옛 동료를 사냥하러 나서기도 하고 그들이 숨은 숲에 불을 지르기도 한다.
결국 그 불 때문에 구조대가 그들을 찾게 되는데, 나무창으로 대항하며 구조를 거부하는 아이들. 구조대원이 그들을 보며 한 마디 한다.
“너희들 여기서 뭐 하는 거니?”
제목과 달리 파리의 등장은 없다. 돼지 사냥을 위해 내걸어놓은 돼지머리에 파리떼가 들러붙어 그 피를 빨아먹는 장면뿐이다. 작가는 문명이 없는 섬에서 조그마한 악귀가 된 아이들을 파리라 불렀고, 잔혹한 인간의 본성을 파리 대왕이라고 부른 듯하다.
인간 본성이 그 수준이라는 거지.
사람을 알아가면서 이들이 사랑하기에 마땅한가 자문하게 된다.
이는 대왕 세종의 고민과도 사뭇 닮았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을 해치는 저 이기적인 자들도 내 백성이 맞는가?”
키다리 캠프를 하면서 가끔 그런 근원적인 질문을 하게 만드는 아이들이 있었다. 자신이 프로그램에 동참하는 대가로 뭘 줄래요, 라고 되바라진 질문을 하는 경우도 있고, 선생님의 희생과 애틋해 하는 마음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생각만큼 아이들은 순수하지 않다. 내 아이 같으면 한바탕 크게 요란한 다그침이라도 했을 법한 행동도 혹여 상처받을까 하지 못한다. 그리고 난 같은 질문을 한다.
“이런 아이도 가능성이 있는 것일까? 내가 무의미한 행동을 하느라 시간을 버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지만 그게 비단 아이들의 문제만은 아니더라. 세상을 알아가면서 (나를 포함하여) 모든 인간 본성에 파리근성이 있음을 발견한다.
만날 때와 헤어질 때 모습이 다르다면 당신은 파리다.
이익이 될 때와 손실을 입을 때 모습이 다르다면 당신은 파리다.
다른 사람의 것을 편취하고자 했다면 당신은 파리다.
당신이 지켜야 할 의무를 방기했다면 당신은 파리다.
자신의 차가 교차로를 가로막을 것을 뻔히 알고서도 꼬리물기를 하는 당신은 파리다.
억울한 사람이 생길 것을 알면서도 위증을 했다면 당신은 파리다.
급여를 받는 입장에서 시간 때우기로 일관한다면 당신은 파리다.
의견을 밝혀야 할 시점에 의견을 밝히지 않고서 나중에 뒷말 한다면 당신은 파리다.
인연을 영업의 대상으로 삼는 것, 당신은 파리다.
노력하는 것 이상으로 공으로 얻고자 했다면 당신은 파리다.
세상에는 파리가 넘친다. 이 파리 쉐이들…
2. 예언자
요 몇 년 간 직장일로 몸이 번잡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기존의 인연들과 접촉을 끊고 멀어져 있다. 좀 더 관조할 수도 있는가 보다. 그렇게 스스로 속였던 부분들을 깨끗이 지울 수 있게 되니 예전에 보지 못한 부분을 보기도 한다. 감사할 일도 많고 또 참 파리스러운 일도 많다. 왜 진작 몰라 보았을까.
이쯤 되면 세상사 등지고 산으로 가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해지기도 한다.
지난 달 아주 괴로운 경험을 한다. 내 피를 빨아댔던 친구. 난 그것도 모른 채 그에게 내 팔을 내맡기고 있었다. 내가 알아차렸을 때 너무 많은 것이 벌어져 있었고 수습하기에는 늦어버린 상황. 그는 또 다시 자신이 저지른 과오를 해결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었고, 그 동안 피를 빨아먹은 것도 모자라 나를 걸고 넘어지려 기를 쓴다.
이미 예전의 순수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괴기스러운 독기만 내뿜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돌이켜보면 그가 파리였음을 나타내는 단초가 그를 만나는 과정에 드러났던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난 그를 좋아라 했고 당시에는 그 단초가 마음에 걸렸지만 ‘휴지통’ 계정으로 던져버렸다는 거지. 이는 <셰익스피어가 말하는 세상을 사는 지혜>에서 언급한, 무의식의 신호를 놓치지 말아라는 메시지와도 통하는 부분이다. 다음달 독토에서 선정한 <블링크>와도 맥이 닿는 이야기일 수 있다.
파리를 곁에 두고 키웠던 것도 알고 보면 내 실책이다.
어찌되었거나 이 시점에서 난 또 다시 질문한다. 그러면 저 파리스러운 인간들도 내 측은지심의 대상이어야 할까?
이는 칼리 지브란의 시 <예언자>에 있는 내용이기도 하다.
“저들은 사랑받을만한 자격이 되는가?”
“저들은 도움을 받을만한 자격이 되는가?”
그런가 보다.
칼리지브란의 시처럼, 사람만이 줄 때 상대가 받을 자격이 되느냐고 묻는다고. 신은 악인이고 선인이고 구별 없이 햇빛도 바람도 주는데, 사람만이 상대가 받을 자격이 되는지 묻는다고.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기 쉽지 않아서 묻는다.
신은 사랑을 이야기하는데 저 파리 쉐이~ 인간도 사랑해야한다면 어떻게 해야하는가, 하고.
신은 용서를 이야기하는데 내 팔에 들러붙어 피를 빠는 그네들을 어떻게 해야하는가, 하고.
십여 년을 버둥거려 보지만 오늘도 결국 미완이다.... 측은하게 여기려고 죽기살기로 노력해 보는 수밖에... 그 수준이 내가 할 수 있는 거네.
어쩌면 신이 내게 바라는 것은 그 너머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파리같은 인간을 곁에서 쫓는 행동을 멈추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내 피를 빨고 있는 그를 원망하는 마음을 잊고 단지 측은하게 여기는 정도. 그게 내 수준이다.
3.
지난 몇 달간 답을 찾고자 노력했고, 최근 미완이나마 스스로 답을 내렸다.
응징을 하는 것은 내 몫이 아니지만, 대응하는 것은 내 의무이기에 마땅히 그가 대가를 치르게 하고자 한다. 변호사에게 그를 상대로 한 소장을 의뢰하고 돌아왔다.
묘한 현상은 내 고심이 전혀 무익하기만 하지는 않았다는 것.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니(적어도 했다고 믿으니) 상황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에도 현재 주어진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사건으로부터 일정 거리 떨어져서 관조할 수 있게 된다. 머리를 찧어야 했던 괴로움은 진작 사라지고 이해할 수 없는 과거가 되었다.
아내와 산책을 하며 묻는다. “그도 나처럼 이 시간 행복해 하고 있을까?”
그렇지, 그가 행복해 하고 있다면 내 마음이 불편하리라. 응당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야 어쩔 수 없다. 이를 두고 여전히 용서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영화를 한 편 보더라도 악인이 승하는 장면은 불편한 게 사람의 마음이니.
하지만 난 상황이 전혀 바뀐 게 없음에도 마음으로 행복을 누린다.
하여, ‘저들 파리 쉐이~ 들도 내 백성이 맞습니까?’ 라는 질문은 그 백성을 위한 질문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을 위한 질문인가 보다. 나 자신 내 속에서 내뿜는 독소에 인생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저들 파리 쉐이~ 들도 사랑해야 하는가요?’ 라는 질문을 해 볼 필요가 있겠다.
(10월 ‘젊은 투자자의 독서 모임’에서)